만덕산 백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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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 이야기

북미륵암

북미륵암

계율을 어겨 하늘에서 쫓겨난 천동과 천녀. 
하루만에 불상을 조각해놓아야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는데 해가 그리 짧았을까? 천년수 나무에 해를 매달아 놓고 작업했다고 한다. 그런데 앉은 모습의 미륵불을 조각하던 천녀는 빨리 올라가고 싶은 욕심에 해를 매달아 놓은 끈을 잘라버리고, 그 끈을 타고 혼자서 하늘로 가버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천동이 울며 불며 천녀를 원망하다가 끝내 남쪽 미륵불을 완성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남기게 되었다고 한다.


 

 

 

 

북암에 모셔진 마애불과 천년수(千年樹)에 얽힌 이야기다. 매번 두륜산을 오를 때마다 천년수에 해를 매달아 놓고 조각을 했다는 천녀와 천동을 생각한다. 사실 천녀와 천동보다 그 전설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더 궁금하다. 무슨 생각에 그런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정말 천녀와 천동이 있었을까? 그러면 허구 많은 죄 중에 당최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골짜기까지 쫓겨왔을까? 

천동을 내버려두고 혼자 하늘로 올라갈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 천녀의 밴댕이 같은 소가지는 누구의 아이디어일까? 소박한 남녀차별이 만들어낸 이야기 일까?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길! 사실 일심으로 가야 할 길에 별스런 생각을 다하다가 북암의 마애불 앞에 섰다. 
천녀가 조각을 했다는 마애불! 막상 그 앞에 서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단지 손을 모으고 절을 하면서 이제야 다시 왔습니다. 

부처님! 고개를 조아릴 뿐이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마애불 옆의 천녀가 살며시 웃는다. 그 웃음에 다시 용기가 난다. 사실 이야기는 더 있는 것이 아닐까? 천녀를 그리워하던 천동! 북암 마애불의 4천녀는 그가 조각 했을련지 모른다. 천녀와 함께 있을 욕심에 슬며시 천녀 얼굴 하나 자기 얼굴 하나 이렇게 조각 했을련지 모른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국보 제308호-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大興寺 北彌勒庵 磨崖如來坐像) 북암의 마애불은 2004년 해체 복원공사를 하면서 건물에 숨겨져 있던 사천녀상의 아름다운 자태가 드러나 2005년 9월에 보물에서 국보로 재 지정되었다.]
 


북암 가는 길은 땅끝 해남의 대흥사 큰절에서 1시간 반 정도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산을 오르는 것이 부담이 되는 이는 진불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조그마한 오솔길을 따라 길을 걸으면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두륜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북암에 오르면 남녘의 다도해가 꿈결처럼 펼쳐진다. 가끔씩 찾는 이라곤 등산객이 전부인 이 암자에 은성스님이 깃든 것은 1998년의 일이다. 

“처음 선방을 댕긴 곳이 [도봉산 망월사]인디 거시기도 차가 안 들어와. 그래서 지가 한 철 먹을 쌀은 지가 지고 와야 방부를 들어줬재. 그적 생각해서 북암 들어와서 사는거제!” 

“차길을 뚫으려면 뚫지 근디 부처님 뵐러 오는 길에 고생을 좀 하는 것도 좋아” 

하시면서 지으시는 웃음이 맑고 선하다. 
산중에서 지게질 하면서 사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스님께서는 산중의 암자에서 사는 비결로 욕심을 버리라고 한다. 욕망에서 벗어나서, 있으면 있는 대로 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것으로 지족함을 아는 것이 암자에서 살아가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몇 년전에 일본의 심수관가에서 80이 넘은 14대 노옹이 일지암을 찾아왔다. 그 분의 평생 소원이 북암에 있는 서탑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노옹을 위해 젊은 청년 몇을 동원해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북암에 올랐다. 
북암에 오른 노옹은 화려하지도 장엄하지도 않은 평범해서 누구나 쉽게 지나치는 삼층석탑 앞에서 말을 잃고 눈물을 흘렀다. 도대체 이 탑의 어떤 모습이 남다른 심미안을 가졌을 노옹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일본의 심수관가는 400년전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도공의 가문이다. 1964년, 병상에서 그의 아버지 13대 수관(壽官)은 격심한 통증과 고열로 괴로워하면서 그에게 말했다. 

“앞으로 33년이 흐르면 초대께서 한국에서 끌려온 지 4백년째가 된다. 그때의 가주(家主)는 누가 되어 있을까. 너거나, 어쩌면 네 아들의 시대거나, 누가 되었든 제대로 제(祭)를 올려 드렸으면 싶다.” 







오싹할 정도의 무언가를 느낀 그날 이후 그는 아버지의 유지를 실현하는 길은 무엇일까 여러모로 궁리하다 그 중 하나로 심수관가에서 400년간 모시던 단군사당 옆에 조선의 맛이 나는 탑을 세우기로 했다. 그래서 한국의 탑 사진을 뒤져서 찾아낸 탑이 바로 이 북암의 서탑이라고 한다. 서탑의 맞은 편 산머리에는 부처님 손바닥 같은 돌 위에 동탑이 세워져 있다. 이 돌탑은 3층 부분이 소실되어 있던 것을 1995년 지금 대흥사 회주이신 보선스님께서 북암 주변의 돌을 깎아서 복원을 했다. 

이 탑이 깨져서 버려져 있을 때는 대흥사도 끊임없는 분란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탑을 복원한 후에는 지금까지 조그마한 분란도 없이 편안하다고 하는데 이 탑의 원력이 커서 일까? 개인적으로 나는 서탑보다 이 동탑에 더 매력을 느낀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기세가 마치 온 산을 호령하는 장수처럼 당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거칠지 않고 소박한 자태에는 마치 뭇 중생을 보살피는 따스함이 녹아 있는 듯한 매력이 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북미륵암 중심의 이 일대가 마치 바다의 게와 같은 형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게가 움직이면 석불이 무너지게 되므로 게의 오른발에 해당되는 서쪽에 3층 석탑을 세우고, 왼발에 해당되는 동쪽에 3층 석탑을 세워 땅의 기운을 눌러 게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 뒤 국보인 북미륵을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말없이 이 터를 지키는 탑과 마애불처럼 오늘도 은성스님은 법당에 올라 기도를 하신다. 스님께서는 암자에 살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나태심이라고 한다. 그래서 스스로 나태해지는 것을 경책하기 위해서 매일 새벽과 사시에 기도를 올린다. 

그렇다고 북암을 굳이 기도도량이라고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기도하는 불자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스님들이 공부하는 수행도량에 가깝다고 하신다. 
스님은 요새 고민이 하나 있으시다. 용화전을 유리로 지어서 마애불을 모셨는데 햇빛이 들고 나는 것 때문에 보기는 좋지만 마애불을 보존하는 측면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국보1호인 숭례문이 불타는 작금의 현실에서 힘든 산중에 노구를 이끌고 지게질을 하며 삶을 꾸리고 국보를 지키는 스님께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스님은 이제 10여년 홀로 사는 삶에 익숙해져 낯 선 등산객이 오면 슬그머니 피해버리신다고 하신다. 어느새 60대가 가까워지니 이제 지게질하기에도 기력이 딸리는 것 같아 다시 걸망을 메고 선방을 찾아 가고 싶다는 스님의 이른 노안에 다도해에 어리는 노을이 걸려있다.


2007년 
Clearmind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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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6-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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