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이 편집한 <만덕사지>에 이 사적비를 가리키며 “옛 비는 유실되어 그 소재를 알 수 없고 귀부만 남았는데, 탄기 스님이 다른 돌로 비를 세우면서 옛날 비석의 귀부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보면, 이전에 비석이 세워졌으나 유실된 후 1681년 탄기 스님이 이를 재건한 것으로 보인다.
귀부와 비석의 양식을 보더라도 건립 연대가 다른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는데, 귀부의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조각 기법도 뛰어나 고려 전기의 작풍이 고스란이 드러난다. 비석은 전형적인 조선 시대 석비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적비 전면에는 백련사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당시 불사(佛事)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양 측면에는 아름다운 초화문이 양각되어 있다. 또한 비석 정상에는 등을 맞댄 채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이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현재 보물 제13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적비 호범상 사적비 옆면 연화문
만덕산 백련사비
고려 때, 원묘국사가 두류에서 찾아와 백련사의 유지를 둘러보니 처세와 기승이 좋아 그의 문도이던 원형, 지담, 법안 등에게 중수할 책임을 맡기니, 중수는 금 대안 3년 신미 1211년에 시작하여 정우 4년 1216년에 마무리하였는데 세운 건물은 모두 80여 채였다.
그리고 문인과 천인 등에게 설법과 담경을 하게 하니 전국 각지에서 승려들이 몰려와 섬기기를 앞다투고, 공경과 목수들은 그의 풍격과 성망을 흠모하여 결사에 함께 한 자가 300명이나 되었다. 고려의 왕도 이 사실을 듣고 정유년(1237년)에 선사(禪師)라 사호하고, 여러 차례 포지를 내리고 세시마다 사뢰한 것이아주 많았다.
이러고부터 본 사찰은 '동방 제일의 도량이 되었다.
11사에게 전발하여 무외국사에 이르렀고, 그도 백련사에서 지냈으며 그의 의발을 전해주고 도법을 드러내 밝혀서 널리 퍼지게 했다. 그러므로 지역과 사람이 함께 세상에서 높임을 받는다는 말처럼 사람들이 이곳 백련사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다른 곳의 산사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In the Goryo Dynasty, Ven. Wonmyo, then National Teacher,
visited the site of old Baekryunsa Temple and recognized the outstanding
and extraordinary surroundings. he let his disciples, Wonhyung, Jidam,
and Beopan, re-establish the temple.
the construction started in 1211 and finished in 1216, ending up with 80 buildings. Ven.
Cheonin Sunim took charge of Dharma meetings and sutra study.
He gained respect from many priests and government officials, and the number
of participants in the Baekryun Society reached about 300.
In 1237, the King endowed him with Mastership and patronized him
with many offerings. The temple produced 11 National Teachers, which gave it the title
"The Best Temple in Korea."
Ven. Muwe Sunim, the last National Teacher from this temple,
stayed here, transmitted his Dharma and spread the teachings.
For all of these reasons, Baekryunsa Temple has long enjoyed
incomparable reverence from many peo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