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산 백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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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 이야기

승복을 처음 입던 날

 

처음 승복을 입던 날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파릇파릇한 스물다섯의 봄날이었다. 김천 직지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헤어지는데 다른 스님들 옷이 좀 달라 보였다. 밑단이 길고 옷고름도 기다란 것이 젊잖아 보이기도 하고 좋아 보였는데 나만 빼고 모두 그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게 두루마기고 밖에서는 이런 옷을 입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쥐구멍에 들어가 숨고 싶다. 그때 적삼만 달랑 준비한 스님이 설마 나 혼자뿐이겠어 라고 혼자 위안을 해본다. 솔직히 밤색 행자복이 회색 승복으로 바뀐 것만으로도 내겐 부족함이 없었다.

직지사에서 내려오는 길! 광주에서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내려가자는 도반의 권유를 뿌리치고 혼자 해남행 막차를 탔다.

 

앞좌석에 노인 두 분 만이 승객 전부인 쓸쓸한 버스였다. 시골길을 달리는 차장 너머 풍경은 유달리 어두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문득 차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낯설다. 민머리에 회색빛 승복, 내가 아닌 누군가가 앉아 있는 듯 했다.

그 낯선 모습에 아! 이제 정말 내가 출가를 했구나! 뼛속 깊이 절절해 진다.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고 싶은데 내가 승려가 됐다고 토로하고 싶은데 지금까지의 인연을 버리고 기어이 출가했다고…….

 

 

 

 

 

하지만 누구 하나 연락할 이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창유리 너머로 부모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형, 동생, 친구들의 모습이 풍경을 스쳐 지나듯 하나 둘씩 크고 깊은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쓸쓸한 버스 뒤 칸에서 웅크리고 소리 없이 울었다.

해남 터미널에서 일지암에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받지 않는다. 그날따라 달도 뜨지 않았다. 캄캄한 숲길을 괜스레 손을 휘저으며 휘적휘적 오른다.

 

큰 절에서 누렁이가 따라 붙었다. 큰 절 개인 누렁이의 원래 이름은 만덕萬德이다. 개 이름으론 너무 큰 이름이라 그러면 오히려 좋지 않다며 스님들은 그냥 만득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늦은 밤 일지암을 오르면 만득이가 꼭 동행을 한다. 그렇지만 자존심이 강해서 아무리 불러도 가까이 오질 않는다. 대신에 멀리서 고개를 뻑뻑이 세우고 내 꽁무니나 잘 따라오라는 듯이 안내를 해 준다. 그렇게 나를 반겨주는 만득이가 고맙다.

 

멀리 비치는 희미한 불빛에 발걸음이 서둘어진다. 성큼성큼 오른 일지암! 적막이 가득하다. 설림당蔎林堂에 작은 메모 쪽지가 놓여 있었다. ‘차를 만들러 보성에 가니 불 때고 따뜻하게 자라’ 만득이는 대웅전 마당에 벌써 자리를 잡았다. 늦은 밤 산중의 고요함이 왜 그렇게 낯설었을까? 걸망을 조심스레 벗어 한켠에 놓고 마루턱에 앉으니 멀리 향로봉이 어두운 하늘에 밤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오래된 신문지와 잔가지로 자우홍련사 아궁이에 밑불을 붙인다. 장작을 넣고 불을 살리는 일은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승려가 된 첫날밤이다. 덩치 큰 고요가 온 산에 얹혀 있다. 비좁은 아궁이 방에 겹겹이 쌓여 있는 장작더미가 눈을 가득 메운다. 갑자기 외로움이 몸서리치게 다가온다.

이제 혼자구나! 앞으로 이렇게 혼자 살아야 하구나! 갑자기 바람이 불었는지 아궁이에서 매운 연기가 솟구치고 연기때문인지 무슨 이유인지 눈물범벅으로 훌쩍 뛰쳐나왔다. 눈물범벅 매운 눈을 비비는데 따뜻한 바람이 온 몸을 부드럽게 감싼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는 새에 살랑거리는 바람이 내 몸을 툭 건들면서 순식간에 지나간다. 뒤따라서 파도치듯 바람 우는 소리, 나무와 숲이 우는 소리 샤아아-철썩 샤아아 철썩. 온 산이 바람이 아니 그게 산과 바람뿐이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자연이 우주가 들려주는 소리였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내게 비밀을 털어놓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온 순간이 내 몸을 깊숙이 지나고 따뜻한 열기가 몸에 퍼진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힌다. 그날 저녁 정말 깊고 편안한 잠을 잤다. 지금까지 그 느낌을 평생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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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12-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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