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산 백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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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 이야기

고은동 빈집

스물넷, 군대를 막 제대하고 전국일주를 하겠다며 무작정 길을 나섰다. 광주에서 야간 비둘기호 기차에 몸을 싣고 부산으로, 부산에서 국도를 따라 걷고 걸어서 경주, 구룡포를 거쳐 속초를 지나 강릉 양양 낙산사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강원도 어느 산골 동네와 설악산 한계령을 넘어 강원도 정선으로,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도시를 지났다. 

 

 

 

 

텐트에 배낭을 짊어지고 쌩쌩 거리는 차를 어렵사리 얻어 타고 다니는 여행은 3주가 넘어서자 한계에 이르렀다. 몸도 마음도 전부 탈진이 된 것이다. 그때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털어 지리산 청학동 옆 마을이던 고은동까지 가는 차편을 구했다. 마침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고은동에서 산()사람이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함께 주간 노동자 신문사에서 활동했던 선배였는데 군대 대신 노동운동을 하겠다며 두 손가락을 잘라버리기까지 했던 신념이 뚜렷한 선배였다.

 

그런 선배가 모든 것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 산사람이 되었다는 소식에 반은 호기심에 반은 지친 몸을 쉬게 할 요량으로 물어물어 고은동 빈집을 찾아 들어갔다.

선배는 산사람이 다 되어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에 허름한 바지를 입고 사람 좋은 미소가 얼굴에 붙어 있었다. 나를 반기는 모습도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는 사람처럼 대수롭지 않게 넉넉하다. 그 바람에 쉽게 고은동 빈집의 동반자가 될 수 있었다. 고은동 빈집에는 없는 게 많다. 전기가 들어올 수 없는 산골이기에 흔한 TV도 없고 신문도 읽을 책도 없다. 음료수나 마실만한 꺼리는 구할 수도 없고, 있어도 보관할 냉장고도 없다. 윙윙 거리며 귓전을 울리던 보일러 소리도 없고 차 지나가는 소리도 없다.

 

대신에 지리산을 품에 안은 너른 마당이 있고, 일 년 사철 늘 차가우면서 새색시 같은 달을 품는 옹달샘이 있고, 밤마다 쏟아지는 별을 맞이하기에 충분한 조그마한 평상이 있고, 차곡차곡 쟁여진 장작더미에는 따뜻한 온기가 배여 있다. 그 온기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낮에는 산으로 더덕이며 취나물, 두릅, 고사리 등을 따러 다닌다. 항아리에 쌀은 있는데 반찬이 없기에 식량조달이라는 심각한 명분이었지만 산을 타는 재미에 본분은 제쳐두기 일쑤이다. 그래도 한 주머니 가득 산채를 따서 내려오는 날이면 만석지기 부럽지 않게 배가 부른다. 선배는 비밀이라며 지리산에 아직도 산적이 산다고 한다.

 

등산객들의 식량을 갈취해서 생활을 영위하는 가난한 산적들이라고 하는데 생김생김은 험상궂게 생겨 무섭지만 자기 같은 산사람하고는 안면 트고 지내는 사이라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한다. 선뜻 믿지 못하는 내게 그 산적 중 한명이라며 털보 아저씨도 소개해 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어찌 그리 순진한 놀림 말에 속았는지 우습다. 동화 같은 고은동 생활이었기에 그런 놀림말도 쉽게 의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비가 오는 날이면 산중에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마련이다. 그 때 선배가 꺼낸 것이 친구가 선물해서 마신다는 우전 녹차였다. 술이 있었으면 아마 술을 했을 것이다. 술은 없고 차도 많이 마시면 취한다는 선배의 말에 속아 하루 종일 차를 마셨다. 나중에 뒷간에서 일을 볼 때 보니까 변이 푸를 정도로 마셨으니 취하지 않으면 정상이 아닐 것이다. 결국 차에 취해서 하루 종일 실실 까닭 없이 웃고 다녔다.

그 선배는 겨울이 다가오면 산 생활을 정리하고 출가를 하겠다고 했다. 당시의 나는 출가란 나와 다른 인연의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기에 선배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렇지만 이유를 묻고 싶지는 않았다. 이유를 굳이 듣지 않아도 심정적인 동조를 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그렇게 쉽게 수긍했던가 의문이 든다. 차에 취해서였을까? 아니면 고은동 생활에 취해서였을까? 결국 그 선배는 고은사로 출가했다. 지금은 송광사에서 강원을 졸업하고 결제철, 산철 가리지 않고 수행하는 선객이 되었다는 소식을 절집 풍문으로 들을 따름이다.

 

그 때 선배와 마신 차가 내 인생에 최초의 차였다. 그때의 차 맛이 어땠는지 지금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그 때의 차 맛이 세간에서 맛보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태어나서 처음 맛본 신비로운 맛이었다. 어쩌면 그 맛은 출세간의 맛이었는지 모른다. 그 차 맛에 홀린 두 청년이 모두 출가자가 되었으니 어쩌면 고은동 빈집에 흐르던 차 향기는 거역할 수 없는 출세간의 향기였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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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17-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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